완구로 자신만의 슈퍼로봇대전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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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3월 01일
김혜련: 현대성의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검은 선의 발현
김혜련: 현대성의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검은 선의 발현

임근준,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현대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현대라는 시공은 어떻게 창출됐는가? 현대성을 추구하는 비전은 어떠한 기술매체와 예술매체를 통해 공유되고 성찰됐는가? 비평적 퍼스펙티브를 창출하고 전파하는 방식은 시대변환의 각 국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현대예술가들이 종종 망각하는 질문들이다.

만약, 현대예술을 통해 현대성의 체제를 (상징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무너뜨리고, 현대와 결별하는 새로운 시공을 창출할 수 있다면? 그러한 검증 불가능한 실험 혹은 모험을 감당할 예술가는 몇이나 될까? 현대예술은 지금과 같은 양태로 지속되는 것이 옳은가? 다중의 리얼리티가 납작한 타임라인 속에서 서로 상충하며 마구 흘러내리는 오늘의 기이한 상황 속에서, 현대예술은 현대적인 존재이기나 한가? 이미 주술적 존재, 스마트폰 사용자 각각에게 맞춰진 망상적 리얼리티의 실재성에 봉사하는 21세기의 의사-토템(pseudo-totem)이 되고 만 것 아닌가?

화가 김혜련(1964-)은 현대성의 시간축을 재설정하는 위대한 도전에 나선 예술가다. 현대 이전의 한반도에 펼쳐졌던 각 시대에 제작된 정념정형의 오브제들을 연결고리이자 관문으로 삼아, 고대의 미분된 묘선(描線)과 선각(線刻)이 이끄는 인간 정신의 남상축(濫觴軸)으로 전진한다. 고인돌에 새겨진 그림들을 조사해 그 조형과 그에 깃든 정념들을 함께 되새기고, 그로부터 재생되는 어떤 시각에 주파수를 맞춤으로써, 그는 기존의 한계점들을 뛰어넘었다. 산업 시대인의 관점에 봉사하는 전통을 답습하는 예술의 한계를, 모더니즘 타파에 눈이 멀어 의사-근대성의 전통을 직조하는 대안적 시도들의 한계를, 민족주의의 필터로 오분류되는 전통을 갈고 다듬는 부류의 의사-장인주의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2014년부터 진행해온 스터디 작업들을 통해, 김혜련은 자신만의 므네모시네 아틀라스를 작성해왔다. (대체로 한반도 남부 각 지역의 시대별 인공조형물들을 조사-탐구하고 묘선과 선각의 길을 추적-의태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한반도나 한국어 문화권에 국한하지 않는다.) 화가는 그가 주목하는 각 유물들의 그림들에서 선을 취해 모양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선긋기의 신체 행위를 야기하는 시각과, 시각과 그리기 행위 모두를 관제하는 동시에 그를 통해 재창출되는 정신’을, 반복적 그리기 행위를 통해 신체에 담는다. 그렇게 실천 행위 모델을 통해 수집-축적된 다종다양의 시각과 행위와 정신은, 다시 머릿속 상상계에서 하나의 면-선-점으로 환원된다. 면이 되는 점과 점이 되는 면을 부리는 그의 선들, 즉 확산적 탐구를 통해 환원되는 선들은, 새로운 해석적/창조적 힘을 발휘하는 단계에 이르는 중이다. 김혜련 특유의 ‘확산적 탐구를 통해 환원되는 선’은, 탐구 대상을 기존의 질서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그 뼈대를 해체한다. 한데, 재구성의 과정에서 본디 탐구 대상에 담겨 있던 어떤 고대적 성격을 추출-강화시킨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2020년의 <예술과 암호-고조선> 연작에서, 화가는 “미지의 퇴적층을 파내며, 잊힌 조형성을 복원”하는 단계에 서 있었다. 한데, 2022년의 개인전 <그림을 쓰다: 훈민정음>에서 그는 복원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훈민정음의 이상향을 조형해온 기존의 조형 질서들을 해체하고 종합함으로써, 그에 담겨 있던 핵심을 재조형해놓고야 말았다. 훈민정음의 세계를 구성하는 판각본들과 여러 서예 기록물들을 세계를 타고 흐르는 고대적 가치관/조형관을 발견해, 새로운 암호적/주술적 긋기-그림의 원시적/초현대적 훈민정음 세계를 창출해낸 것이다.

김혜련의 선을 김호득의 선과 비교해 봐도 흥미롭다. 김호득의 붓에서 나오는 선이 ‘이미지로 독해되는 것을 용인하는 추상적 선묘 행위의 흥취를 특징으로 하는, 동시대적이고 도가적인 선’이라면, 김혜련의 선은 ‘대상의 원류를 보고 그 시간축에 잠들어있던 연결고리를 그어내는, 즉 대상을 죽여서 원현상을 되살리는 제사장의 칼과 같은 선’이기에, 비동시대적이고 종교적인 성격마저 띤다. 그래서 김혜련의 필선에는 그래서 기이한 골격(骨格)의 멋이 깃들기도 한다.

같은 말을 시적으로 함축해놓자면, 다음과 같다: “고대의 정신에 주파수를 맞추는 필선의 울림과, 심안에 의지하는 필획의 뼈대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우주 나무의 길을 찾고 또 찾는다.”

고대를 응시하는 오늘의 눈을 통해 아무도 요구한 적이 없는 내일을 그어내는 실천엔, 어떤 문화사적 예술사적 의의가 있을까? (김혜련의 선이 시간을 분절하는 동시에 재통합해내는 경향을 띤다는 점은, 언제 생각해도 흥미롭다.)

현대성의 체제로 창출할 수 있는 미래상과 그를 통해 구현해내는 ‘현재가 되는 근미래’엔 한계가 있으니, 이제 우리는 시간의 축을 재사고하고 재창조해야 하는 단계에 봉착해 있다. 참된 돌파 지점은 과학기술자들이 창출해낸다고도 하지만, 예술가나 예술가적 존재들의 기여도 무시할 것은 못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도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도, 유물을 통해 고대를 탐구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회화 세계—그림을 보는 방식과 세상을 보고 읽는 방식 모두의 혁신을 요구했던—를 창조해냈다. 일안원근법적 재현의 한계를 벗어나는 현상학적/경험주의적 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폴 세잔은 루벤스와 푸생을 참조해 창조적 고대의 재발견에 동참했고, 위대한 대수욕도의 미완-세계에 가 닿을 수 있었다. 세잔에게 자극을 받은 마티스가 <삶의 기쁨(Le bonheur de vivre)>에서 선사시대 벽화를 참조하고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통해 그를 다시 반박하고 나선 역사는 더 잘 알려져 있다.

하면,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 고대 탐구는 어떤 양상을 띠었는가? 민족주의적 전통 탐구의 프로젝트에 자리를 내어주거나 혹은 그 흐름에 병합되고 말았지만, 통일 신라의 유적이나 고구려 고분의 벽화 등이 한때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고대적 영감의 원천으로 간주됐던 적이 있다. 하면, 아시아 공통의 고대를 재발견하고 재탐구해 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내고야 마는 미술가는 왜 나오지 못했을까?

나는 화가 김혜련을 ‘한국성 탐구를 통해 한국성의 한계를 초극하는 단계에 도달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거장’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예술가로서 그는, 하나의 확산 가능한, 수행적 실천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머잖아 그는, 아랫세대의 화가들에게 대안적/필연적 시공이자 영감의 원천으로서 발굴/발견되고야 말리라 믿는다. ///

추신) 어려서부터 오랜 역사가 깃든 곳이나 사물을 마주하게 되면, 늘 고대의 위대한 정령들에게 기도하곤 했다. 내가 그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겠노라고. 하니 보잘것없는 내게 힘과 운을 보태 달라고.

김혜련 화백의 파주 작업실에서 나는 자라나는 우주목을 봤다. 돌아오는 길에, 시각뇌-마음에 담긴 그 우주목을 향해/통해 기원의 노래를 불렀다. 한반도 문화를 관통해온 ‘구수한 큰 맛’(현대화를 거부해온 원시적 품위)으로 온 인류를 아우르는 우주목의 대안적 질서를 재발견하고 그 거듭남의 시공을 함께/따로 나누는 사업에, 생명 창조에 가까운 힘을 허락해 달라고.

*월간미술 2022년 3월호 특집 기고문. 귀한 지면을 주신 편집부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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